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황고둔 사건 (문단 편집) ==== 히로히토의 정치적 영향력 행사와 의지 ==== 이 사건의 중요성 중 하나는 히로히토의 정치력 영향력 행사와 의지가 드러난 사건이라는 점이다. 2차 세계대전 패전 후 히로히토는 독백록이란 문서를 작성한다. 독백록은 도쿄재판이 진행중이던 1946년 6월에 문서화됐고 1989년 히로히토가 죽은 직후 『쇼와 천황독백록』으로 공개되었다. 독백록은 “천황이 전쟁 지도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천황]]은 전쟁에서의 무력한 희생자였다는 것을 변명하는 기록”한 문서였고 작성의 목적은 “천황을 도쿄재판으로부터 보호하는 일이었다.”[* 박진우, 『천황의 전쟁 책임 : 봉인·망각과 왜곡·미화의 역사인식』(서울 : 제이앤씨, 2013), p.23-24] 그러나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독백록은 오히려 히로히토가 적극적으로 전쟁에 관여했다는 증거라고 평가한다. 독백록을 읽어보면 당시 천황은 내외의 정세에 통달하고 있었으며, 내각의 인사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있었다[* 박진우, 『천황의 전쟁 책임 : 봉인·망각과 왜곡·미화의 역사인식』(서울 : 제이앤씨, 2013), p.27] 그 독백록에서 히로히토는 [[관동군]] 참모장교 [[고모토 다이사쿠]]가 저지른 1928년 만주군벌 장작림 폭살사건에 관련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히로히토는 당시에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여 내각을 총사직하게 했었다. 이에 대해 히로히토는 자신의 ‘젊은 혈기’로 [[다나카 기이치]] 수상을 질타하여 내각이 총사직한 점을 반성하고 이후 내각이 천황에게 상주(上奏)하면 그것이 설령 자신의 의견과 달라도 재가하기로 했다고 술회했다.[* 박진우, 『천황의 전쟁 책임』,p.26] 앤드루 고든은 『현대일본의 역사』에서 당시 폭살사건을 설명하며 히토히토가 막후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의지와 영향력을 명백하게 보여주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1928년 6월, 관동군 참모장교 [[고모토 다이사쿠]]가 중국 군벌 [[장쭤린]]이 타고 있던 열차를 폭파하고, 그것을 [[장쭤린]]과 대립하는 중국인 라이벌들의 짓인양 위장했다.…관동군 모략자들은 그의 폭살이 계기가 되어, 다나카 총리가 만주에서 더욱 강경한 정책을 지지하게 되기를 기대했다.…[[다나카 기이치|다나카]]는 관동군 지도자들이 바라고 있던 과격한 방침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장쭤린 폭살이 실제로는 관동군의 짓이었다는 것이 판명되자, 천황으로부터 다나카 내각에게 군부가 안팎으로 체면을 잃지 않게 하라는 압력이 가해졌다.…다나카의 사건처리에 대해 히로히토 천황이 불만의 뜻을 표명한 것이 계기가 되어, 다나카 내각은 총사퇴했다. 아무튼 이 사건은 천황이 위기의 순간에 막후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의지와 영향력을 갖추고 있음을 명백하게 보여주었다.[* 앤드루 고든, 『현대일본의 역사 : 도쿠가와 시대에서 현대까지. 2』, 문현숙, 김우영 옮김 (서울 : 이산, 2015), p.421]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